쇄락한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나 계급의 벽을 느끼고 동학에 참여한 동학도였으며, 나라 뺏고 국모를 시해한 일본인에 대한 분노를 이기지 못해 일인을 살인하고 감옥에 갇힌 살인범이었으며, 삶을 등지고 한 때 불가에 귀의한 중이었으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였으며, 독립군 창설을 이끌어낸 정치가였으며, 독립 후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이념에 따라 민족이 갈라지는 것을 반대했던 민족주의자였으며, 민족의 독립이야 말로 세계평화에 이바지 하는 길임을 설파한 평화주의자였으며,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했던 문화주의자였며, 어머니를 끔찍히 생각했던 효자 김구.

환란의 시대를 살아갔던 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김구가 어떤 인물인가를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마는 굳이 쓰자면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테러리스트'라고 말 하겠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지휘한 막후 지도자. 테러리스트 김구는 자랑스럽게도 자식들에게 자신의 일생을 기록한 '백범일지'를 남겼다. 그는 비록 손을 피로 물들였지만 민족을 위한 일이었기에 한 점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김구는 테러를 패망국 조선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길이며, 세계에 흩어진 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힘이라고 믿었다.


9.11테러 이후, 테러리스트라고 하면, 악당으로 여겨지는 듯 하다. 하지만 테러리스트가 일방적인 적의 개념은 아니라는 것을 김구는 보여준다. 어느쪽 입장에 서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애국자일 수도 있고, 살인자가 될 수도 있다. 김구는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악질 조선인'이었겠지만,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는 위대한 인물이지 않은가. 특히, 백범이 일반인이 아닌 군부, 정치인, 배신자 등을 테러의 대상으로 삼았던 점은 오늘날의 무분별한 테러 행위와 구별된다.

백범은 자서전 말미에서, 평화세계를 소망하노라고 밝히고 있다. 김구는 그러한 평화는 모든 민족이 동등한 입장에 설 때에만 가능하다고 설파했다. 타 민족을 업신여기고, 자신의 민족을 우월하다고 여길 때 불행은 시작된다고. 백범일지를 손에 들고, 총과 칼을 든 바위 같은 침입자 앞에 대화와 타협이 아닌 보잘 것 없는 폭탄으로 맞선 그를 누가 욕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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