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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로 산다는 것
고종석 외 다수 / 호미
267p / 1만원

내가 기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던 게 언제였더라. 고등학교 2학년 때 였으니까 벌써 14년 전의 일이다. 이과 계열이었던 나는 대학을 문과계열로 교차지원할만큼 기자가 되겠다는 목표가 확고했다. 그래서 전공도 신문방송학과를 택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다. 신문방송학을 전공 하는 것과 기자가 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덕분에 군대에서도 정훈장교 보직을 받을 수 있었다. 뭐 그럭저럭 운도 좋아 군 제대 다음 해에 기자가 됐으니 꿈을 참 빨리도 이룬 셈이다.

그렇게 2003년 이래로 기자생활을 시작해 햇수로 벌써 5년째.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꿈꾸던 기자생활을 적지 않게 해 왔는데 이건 뭘까. 팥 없는 찐빵 같다고나 할까. 아니, 김치를 담그기는 했는데, 맛도 들기 전에 쉬어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이런 젠장. 후배들이 '기자로 산다는 것'이 뭐냐고 물으면 어떤 얘기를 해 줘야 할지 난감하다. 그런 어려운 질문을 하는 주변머리 없는 놈을 만나면 대답 대신 이 책을 권해줘야 할 것 같다.
 
'기자로 산다는 것'은 삼성 기사삭제로 파업을 하게 됐고 결국은 새로운 잡지 '시사 인'을 창간한 '진품' 시사저널 기자들의 이야기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없어서 분노했던 사람들. 신념을 위해 끝까지 싸운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언론인이 뭔지 제대로 알 수 있겠지. 문장도 수려하니 좋은 기자가 되려면 글도 잘 써야 한다는 걸 덤으로 알게 될 터이다.

기왕 얘기를 했으니 말인데, 솔직히 내 기자 정신은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를 망각의 샘에 풍덩 빠져있었던 것 같다. 그 정신이 다시 수면 위로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너무 오랜만에 맞닥뜨린 맑은 공기에 깜짝 놀랐는지 아니면 부끄러워서인지 물 위로 쑥 올라오기를 망설이고 있으니 대략 난감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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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락한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나 계급의 벽을 느끼고 동학에 참여한 동학도였으며, 나라 뺏고 국모를 시해한 일본인에 대한 분노를 이기지 못해 일인을 살인하고 감옥에 갇힌 살인범이었으며, 삶을 등지고 한 때 불가에 귀의한 중이었으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였으며, 독립군 창설을 이끌어낸 정치가였으며, 독립 후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이념에 따라 민족이 갈라지는 것을 반대했던 민족주의자였으며, 민족의 독립이야 말로 세계평화에 이바지 하는 길임을 설파한 평화주의자였으며,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했던 문화주의자였며, 어머니를 끔찍히 생각했던 효자 김구.

환란의 시대를 살아갔던 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김구가 어떤 인물인가를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마는 굳이 쓰자면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테러리스트'라고 말 하겠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지휘한 막후 지도자. 테러리스트 김구는 자랑스럽게도 자식들에게 자신의 일생을 기록한 '백범일지'를 남겼다. 그는 비록 손을 피로 물들였지만 민족을 위한 일이었기에 한 점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김구는 테러를 패망국 조선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길이며, 세계에 흩어진 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힘이라고 믿었다.


9.11테러 이후, 테러리스트라고 하면, 악당으로 여겨지는 듯 하다. 하지만 테러리스트가 일방적인 적의 개념은 아니라는 것을 김구는 보여준다. 어느쪽 입장에 서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애국자일 수도 있고, 살인자가 될 수도 있다. 김구는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악질 조선인'이었겠지만,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는 위대한 인물이지 않은가. 특히, 백범이 일반인이 아닌 군부, 정치인, 배신자 등을 테러의 대상으로 삼았던 점은 오늘날의 무분별한 테러 행위와 구별된다.

백범은 자서전 말미에서, 평화세계를 소망하노라고 밝히고 있다. 김구는 그러한 평화는 모든 민족이 동등한 입장에 설 때에만 가능하다고 설파했다. 타 민족을 업신여기고, 자신의 민족을 우월하다고 여길 때 불행은 시작된다고. 백범일지를 손에 들고, 총과 칼을 든 바위 같은 침입자 앞에 대화와 타협이 아닌 보잘 것 없는 폭탄으로 맞선 그를 누가 욕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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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본성에 대하여
에드워드 윌슨 /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341p. 15000원

“그들은 철근콘크리트로 둥지를 만든다. 이 단단한 철근콘크리트에 부딪히면 다칠 염려가 있으므로 내벽에는 섬유로 된 부드러운 재료를 댄다. 그들은 둥지 안에 입방체로 된 갖가지 물건을 들여놓는다. 이 물건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거나 빛을 발한다. 그들은 다리를 부지런히 놀려 둥지 안에 들어가면 바닥이나 걸터앉는 기구에 가만히 앉아서 그들 특유의 지절거림을 시작한다. 수컷이 자기 둥지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하는 행위는 대개 오줌을 누는 것이다. 아마도 자기의 페로몬을 방출하기 위해 그러는 듯하다. 암컷이 둥지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하는 행위는 군것질을 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단편소설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에서, 우주인이 바라본 인간의 생활을 위와 같이 묘사했다. 이들 우주인은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로 바캉스 삼아 지구에 놀러오기도 하고 인간을 관찰하며, 또 때로는 인간을 포획해 애완동물로 삼기도 한다.

베르베르가 소설 ‘개미’에 이어 이런 허무맹랑해 보이는 소설을 쓴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베르베르가, 동명의 저서, ‘개미’를 쓴 에드워드 윌슨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윌슨은 학문서 ‘개미’와 더불어 두 번의 퓰리처상을 안겨준 저서 ‘인간본성에 대하여’에서 자아중심적 인간중심주의를 버리고, 생물학적 입장에서 하나의 생물종으로 인간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윌슨은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여기며, 우주 최고의 생물체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현실은 다를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정말로 우월한 외계 생물 종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흥미롭지도 않고, 지능도 낮고, 사회 조직도 이미 다른 행성에서 흔히 보았던 유형이라는 것을 발견할지 모른다”

호랑이도 죽어서 유전자를 남기고 인간도 죽어서 유전자를 남긴다. 모든 생물이 진화실험의 산물, 즉 수백만 년에 걸쳐 유전자와 환경 사이에 이루어진 상호작용의 산물이듯이 인간 역시 유전자의 역사를 담은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윌슨은 인간을 특별한 존재가 아닌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하나의 생물종으로 바라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동물들이 보여준 무리 생활의 특성이 인간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믿음으로 윌슨은 인간 사회를 생물학적 관점으로 분석한다. 바로 사회생물학이다.
윌슨은 인간이 유전자가 정해준 대로 움직인다고 결론짓는다. 인간이 이룩한 문명은 전 인류적으로 공통의 특징을 갖고 있는데 이는 이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명령이 그렇게 하라고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인간 개개인은 시시각각 ‘선택’을 하고, 그에 따라 삶이 변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어떠한 선택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다는 제한을 깔고 있다. 인간의 정신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장치이자 유전자를 후대에 온전히 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인간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정해진 흐름에 따라 만들어진 셈이다. 대규모 노예제의 탄생은 전쟁과 제국주의의 팽창, 주요 농작물의 대체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노예제는 제도의 결함으로 숙명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멕시코 등 세계 곳곳에서 문명이 출현했지만 이들 문명의 성장 단계가 서로 닮아 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것. 수렵 채집 사회에서 부족이 탄생하고 남성 지도자가 출현하고 이웃 간 집단 동맹이 출현하고 나아가 계급제와 종교가 생기기까지 지나치리만큼 닮아 있는 것은 진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진화는 유전자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특질 때문이라는 얘기가 된다.

특히, 인간은 일정량 이상의 육식을 필요로 했으며, 고기 섭취가 부족한 경우 인간을 잡아먹었다는 얘기는 무척 흥미롭다. 때론 육식 부족의 결과가 인도에서 브라만교에 대항하는 불교와 자이나교 같은 신흥 종교의 확산을 낳기도 했다. 불교와 자이나교가 동물 상해를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이다.

윌슨은 인간의 공격성 역시 인간 유전자에 따른 당연한 현상으로 설명한다. 이 같은 호전적 정책의 배후에는 자민족 중심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세계를 공격하고 살해할 수 있는 적과 그럴 수 없는 동료로 구별해 준다. 이런 대비는 적을 끔찍한 존재, 인간 이하의 존재로 격하시킴으로써 더욱 강화되고 정당화 된다. 잔인한 살인을 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이미 적을 인간이하의 존재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며, 나와 나의 동료를 보호한다는 의식 때문이다.

性은 어떤가. 윌슨이 말하는 인간의 성은 남성 중심적으로 이뤄지는 일부다처제형이다. 인류의 4분의3이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있는 반면, 일처다부제형은 1%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이론은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남성과 여성의 평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깔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은 기질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 포유동물 생물학의 일반 원칙과 부합된다는 것이다.

문화는 남성 중심으로 이어져 왔으며, 여성은 재산으로서 거래되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남성은 족장, 무당, 법관, 전사 등의 지위를 가지고 통치자로 군림해 왔다. 윌슨은 이러한 전통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평등한 기회와 참여권만을 보장하고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은 이스라엘 키부츠에서 세대를 거치면서 여성들의 정치, 경영, 노동의 참여가 줄어들고 양육 등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는 사실은 뜻밖이다. 이러한 사례는 윌슨의 논리를 뒷받침해 준다.

하지만 윌슨이 이 책을 저술한지 30년이 다 돼가는 지금, 세상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여성의 정치, 경영, 노동 참여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미국에서 일부 고학력 여성들이 양육으로 회귀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여성의 사회참여는 거스를 수 없는 현상인 듯 보인다.

왜 그럴까? 윌슨의 논리대로라면 유전자가 살아남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임에 틀림없다. 사회의 발달은 노동력의 부족을 낳았고 이는 여성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또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정보화 사회의 발현도 여성의 사회 진출을 쉽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노동력의 필요성이 양육의 필요성을 압도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윌슨은 이타주의도 유전자에 의한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이라고 설명한다. 이타주의는 인간에게 있어 친족이나 부족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진화해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타주의는 친족이나 부족을 넘어서는 보다 큰 차원을 위해서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이타심을 발휘할 확률이 높다고 할 수 있겠다. 숭고한 종교적인 희생도 ‘나의 종교’, ‘나의 신’을 먼저 염두에 두는 것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유전자적인 성향을 벗어날 수는 없다고 책은 기술하고 있다.

종교 역시 인간이 살아남을 확률을 높여주기 위한 활동으로 기술된다. 종교는 위대한 능력이 있음을 주장하는 단체의 일원이 될 자격을 부여해 주고 삶의 목표를 제공해 준다. 집단은 힘이 되고 목표는 삶에 원동력이 된다.

지금까지 책에 기술된 대부분의 내용, 공격성과 이타주의, 종교적 성향을 종합 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중동의 전쟁 상황이 아닐까 싶다.

미국이 주도하는 이라크戰에는 세계의 평화를 보호한다는, 좀 더 정확하게는, 미국 시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이 깔려있다. 넓은 의미의, 자신의 ‘부족’을 보호하기 위한 이타주의다. 사실 이것은 드러난 명분일 뿐이고 미국의 속마음은 석유 자원의 확보에 가 있을 것이다. 자민족 중심주의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인간의 목숨은 귀하다고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선봉장 미국은 자국민이 한 명이라도 죽는 일에는 온 나라가 호들갑을 떨지만, 멀리 떨어진 이라크에서는 그 나라 국민이 매일 수백 명씩 죽어나간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이 전쟁에 빠질 수 없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종교다. 기독교와 이슬람 두 문명의 충돌, 종교의 충돌은 보다 치열한 전쟁을 만들고 있다. 성전을 외치며 얼마나 많은 이슬람 인들이 자살 폭탄테러를 감행하는 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민족에 대한 적개심은 복수와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사담 후세인이 왜 처형을 당했던가. 그는 공식적으로는 시아파의 수장으로서 수니파 주민을 학살한 혐의로 형을 언도 받았다.

인간을 삶을 풍요롭게 해 주고 있다고 믿었던 이타주의와 종교가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일에 이용되고 있다니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좀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윌슨의 이론대로라면 세계 1차·2차 대전은 인류가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역사의 한 장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인간의 공격성은 여전하다. 앞으로도 인간은 수없이 많은 전쟁을 겪어야 하는 비극적 운명 앞에 놓여 있는 셈이다. 히틀러의 유대인 대 학살은 어떤가. 윌슨의 설명을 빌리면, 인간은 자신이 속한 구성원 외의 대상을 자신들보다 못한 존재로 격하시킴으로써 잔혹한 공격성을 합리화한다. 히틀러의 대 학살극은 이러한 공격성을 그대로 설명해 준다. 히틀러가 아니더라도 잔혹한 독재자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잔혹한 독재자가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출연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의 사회생물학은 많은 부분 인간의 본성을 설명해 주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불편함을 담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한 감정을 느꼈던 것은 인간이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는 서두의 딜레마를 인정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논리 앞에서 인간의 평등함과 자유는 난도질당한다.

덧붙이는 글 : 내용의 난해함은 둘째치고,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 읽기 쉽지 않았다. 개정판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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